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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나의 소년시절의 기억

by 전실근 2021. 10. 26.

나는 제2차 대전 종전 해인 1945년 봄, 5세 때에 일본 오사카에서 경남 삼천포 죽림동 (남양)이라는 마을로 귀향하였다. 해방과 더불어 나는 남양국민학교 (현재는 남양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4학년 때에 6.25을 맞이하였고, 전쟁기간에 초등학교를 졸업하였다. 나의 기억으로는 나의 초등 6년은 고난의 시절이었다고 기억된다. 우리말을 제대로 할 수 없어 학교에서 왕따 당한 것이 나에게 잊을 수 없는 설움과 고통이었다. 자라면서 무엇 때문에 일본에서 귀향했는가 항상 의문이었다. 성장하면서 어머님이 전해 준 말에 의하면, 조부모와 부모 형제들의 권유 때문에 귀국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우리들 (당시 41, 뒤에 11녀 더 출생)의 생활은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지독히 가난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미일 전쟁 중 일본에서는 우리들은 대체로 유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오사카 소방서에 근무했고, 어머님은 우리가 살았던 집 아래층에서 자그마 한 구멍가게를 운영했다고 한다. 나의 형 둘은 소학교를 다녔다고 했다.

 

일본에서 가져온 돈 몇 푼으로 논 몇 마지를 구입하고 가족 9명이 겨우 거주할 수 있었던 초가집을 마련하게 되었지만, 부모님은 농사를 지어 본 적이 없어 매우 힘든 생활이 이어졌다. 6.25 종전 해에 초등학교를 졸업하였지만 가정 형편상 학업을 이어 갈 수가 없었다. 어린 나이에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마을 친구들과 땔감을 찾아 지게를 지고 와룡산 (801m)에 오르는 것이 나의 소년시절의 일상생활이었다. 학업은 계속할 수 없어 무엇이라도 생존을 위해 찾을 수 있었던 것은 헐벗은 산에 올라 땔감이라도 마련하고 또한 장작나무를 어느 기간 동안 말렸다가 동트기 전 새벽 4시경에 한 다발 정도 되는 장작 나무를 지게에 지고 약 10리길 삼천포 시장에 팔러 가는 것이 나의 생계 수단이었다. 가난한 가정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또한 미래를 생각하며 어떠한 어려운 환경이라도 참고 살아야 되겠다는 강한 집념을 가졌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신체적으로 한창 성장하는 시기인데도 불구하고 생계를 위해 발버둥 치게 된 것은 나의 성장에 많은 장애를 안겨 주었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힘겨운 와룡산을 거의 매일 오르락내리락 한 것은 힘들고 고통스러운 어린 시절이었다.

 

이러한 고통의 소년시절을 벗어나기 위해 우리 가족은 삼천포를 거쳐 부산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게 된 것이었다. 우리 가족 모두의 지독한 가난은 거의 4분의1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또한 나는 부산대 영문과를 졸업할 때 까지 일일이 열거할 수도 표현할 수도 없는 어려운 생활을 하였으나 이탈하기 쉬운 소년시절을 참고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굴하지 않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고 착실하게 살아야 된다는 어머님의 가르침이 나에게 힘과 용기가 되었다.

 

6.25 사변 후 부산에서 약 2년간 온갖 잡다한 일을 하다가 어느 날 넝마 주이들에게 끌려가 가까스로 3개월 만에 탈출하여 모 사립중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하였다. 사변 후에는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던 시기였다. 나는 정상적인 중학교 과정을 이수하지 않고 2학년에 들어가 졸업하고 동래고등학교에 정식 입학하여, 우등생은 되지 못하고 3년간 개근을 하였다. 고등학교 3학년 때에는 이과 문과로 나누어 수업을 받게 되었는데 사실은 의사가 되고 싶어 이과를 지원하려다 가정 형편관계로 문과를 지원하여 부산대 영문학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영문과를 가게 된 동기는 내가 살고 있었던 곳이 햐야리아 미군부대 근처라 자주 미군들과 접촉하게된 것이 영문과를 택한 것이고 또한 졸업 후 영어선생님이 유일한 꿈이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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