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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대마도 기행

by 전실근 2021. 10. 24.

대마도! 누구나 부산근교의 바닷가에 나가보면 항상 생각케 되고 맑은 날이면 육안으로 손에 잡힐 듯 보이는 섬. 우리는 이 섬을 지척에 두고, 하물며 거제도 가기보다도 더 가까운섬, 부산에서 53km 35노트 쾌속정으로 1시간20분 걸리는 거리, 이곳을 우리는 이국땅이라 한다.

부산동백 로타리클럽회원 일행 6명이 이곳을 찾은 것은 518일 하오 4시께 상상한 것 보다도 더 아름답고 조용한 섬. 상대마도 전장께서 우리 일행을 부두에서 맞이해 주었고 세관 직원이 배에 승선하여 5분만에 휴대품을 검사한 후 입국 수속도 5 분만에 완료 했었다.

일본정부에서 운영하는 국민숙사에 여장을 풀고 전장이 베풀어준 만찬에 일본식 유카라를 입고 참석하여 일본 전통 음식인 스키아키를 즐겼다.

해변은 자연 그대로 보존되어있고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는 5월의 태양아래 고운 초록빛을 띠고 있었다. 이곳 대마도는 조그마한 섬들이 18개로 구성되어 있기 대문에 멀리서 밀려오는 파도가 섬 가까이 오면서 잔잔해지는 것이다.

이 대마도는 한마디로 인간이 더럽히지 않은 자연그대로의 낙원이고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목욕탕 굴뚝도 찾아볼 수 없고 아름다운 여러 섬들로 구성되어 있는 곳이다. 더욱이 이츠하라시내 한복판으로 가로 흐르는 냇물에 숭어떼들이 다니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크고 작은 섬 18개가 마치 조가비를 엎어둔 모양 옹기종기 둘러 있어 아름다운 경관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여러개의 섬 중에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는 곳은 4개섬 분이다.

대마도에는 48천명의 인구가 살고 있는데 그 중 1백명 정도의 학국인이 살고 있고 이중 10명 정도가 조총련계라고 한다.

대마도에는 1945년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에 희생된 영혼들을 추모하기 위해서 환락가 및 유흥시설을 설치하지 못하게 법적으로 제한하고 있다.

여러섬으로 되어 있어 직선 도로가 2m 이상 이어진 곳이 그리 많지 않으며 산과 산 섬과 섬을 잇는 고불고불한 산길은 완전히 밀림을 연상케할 정도이다.

2차 세계대전종말이전까지 대마도 섬 주민들의 일일 생활권이 부산이었다고 말하는 한 일본인 공무원은 자기 부친은 자주 부산을 찾곤 했으며 자기형은 병이나서 치료를 부산 시립병원에서 받았고 세상을 떠날때도 부산에서 병사했다고 전하면서 형을 추모하기 위하여 벌써 부산을 27번이나 찾았갔다고 전했다. 앞으로도 수차례 찾고 싶은 곳이 부산이라고 하면서 어쩐지 자기 조상은 한국사람인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우리들에게 말했다.

대마도는 옛날 삼국시대 분명히 신라땅이라고 본다. 역사책에 보면 신라 경주 속현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번 여행을 통하여 한 일본인 국어교사가 우리 일행을 맞이하여 안내를 해 주었다. 그분은 일본 역사 서적을 상당히 많이 읽고 또한 자기 나름대로 대마도를 연구한 분이었다.

이 교사가 우리 일행에게 설명하기로 대마도에서는 약200단어의 한국어가 그대로 쓰이고 있다고 했다. 예를 들면, 지게, 고구마, 온돌, 등등..

90%이상국보급 보물이 한민족 조상의 얼이 담겨있는 불상 범종 성()같은 국보 및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데에 한국민의 한사람으로서 긍지를 느꼈다.

최근 단장한 것으로 보이는 신라시대 사신인 박재상 순국 묘비와 이츠하라에 세워진 최익현선생의 순국묘비를 우리들에게 안내해 주었다. 삼국시대에 전체섬의 상반부는 신라영토였고 하반부는 백제 영토엿으며 그 후 동해안에 일본인들이 조금씩 거주하기 시작하여 백제 영토를 빼앗고 나중에는 신라 영토를 빼앗았다고 전해 주었다.

해방 이전까지 대마도 주민들은 나무와 숯을 만들어 배에 싣고 부산에 와서 물물교환을 해 갔고 위급 환자들은 모두 부산에서 치료를 받았었다고 전하고 있다.

자유당 시절 고이승만대통령도 항상 말하기를 "대마도는 한국땅" 이라고 했었다. 필자가 생각해도 분명히 대마도는 한국땅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우리 선조들이 항상 내분에만 휩싸여 후세를 위한 올바른 정치를 하지 못하고 국력이 쇠약한 탓으로 일본인들에게 빼앗긴 섬이고 또한 해방 이후 정치 지도자를이 오직 권력 다툼에만 눈이 어두워 대마도를 우리 땅으로 되찾지 못했던 탓도 있었지 않겠나는 의문을 남기면서 이츠하라에서 배를 타고 부산으로 오면서 몇번이고 머리속에 대마도를 그려보며 아쉬운 마음을 달랠길이 없었다. (이글은 199061일자 부산 항도신문에 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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