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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어린 시절의 고향

by 전실근 2022. 2. 1.

나의 어린 시절 고향

오늘은 고향이 같은 후배 사진가의 모친의 장례식장에 갔다. 놀랍게도 장례식장은 내가 어린시절 뛰놀던 고향마을이고 더욱더 놀라운 것은 내가 6년 동안 다녔던 초등학교에서 불과 약 150m 떨어져 있는 곳이였다.

 

고향을 떠난지가 약 60년이 지났지만 직계 가족은 아무도 이 고향에 살지 아니하여 별로 관심이 없었다. 이곳을 지나치면서 먼 길에서 조부모가 잠들어 있는 먼산에 잠시 묵념을 하는 정도 였다. 잠시 장례식장내에 머물었다가 나의 모교 초등학교로 갔다. 어린 시절 옛 모습은 아니였고, 마침 일요일이라 아무도 없는 운동장을 거닐면서 뒷산을 처다 보았다. 6.25 사번때는 인민국들이 이곳까지 내려와 점령을 하였고, 또한 1.4 후퇴시에는 빨갱이 잔당들이 남아 밤바다 총소리가 났던 산을 처다 봤다. 그 산은 경남 삼천포에 있는 와룡산이다.

 

나는 일본에서 태어나 1945년 해방 직전에 부모 형제들과 함께 연락선을 타고 삼천포로 왔다. 부모들이 지참해 온 돈으로 논 몇 마지를 사서 생활을 했다. 보모들은 일본에서 수십년간 살았기 때문에 농사일을 해본 경험이 전혀 없었다. 식구는 더 늘어나고 하여 초등학교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교육을 더 받을 수 있는 환경이 되지 못했다.

 

초등학교 교정을 걸으면서 와룡산을 한참이나 쳐다 보왔다. 초등 졸업 후 이 산을 지게를 지고 수없이 오르내렸다. 헐 벗은 산에 나무하려 동네 아이들과 같이 올라 나뭇가지 몇 개를 껵어 지게에 지고 내려오면서 허기 지쳐 굴으게 되면 지게는 부셔져 산산 조각이 나는 경우도 있었다.

 

이곳 삼천도 남양은 부친의 부모형제가 있는 고향이었다. 부의 부모 형제들의 강력한 권유에 의해 해방 직전 관부연략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녀 온 그 자체가 우리 가족에게는 시련과 고통이 시작되었다. 뒤 돌아 보면 소설 몇권을 쓰고도 남을 이야기가 많다. 우리 식구 모두가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 많았다.

 

내 나이 16세때에 몇 마지 남지 낳은 농토를 정리하여 부산으로 이사를 왔다. 손에 쥔 돈이라고는 아홉 식구 (부모 및 7남매)의 끼니를 한달도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상상을 초월할 만큰 모두가 먹고 살기 위햐여 허둥지둥하게 되었다. 국민 소득 60불정도 인 가난한 나라에서 배우지 못안 사람를이 일자리 구하기는 하늘 별따기 보다 어려웠다.

 

부산으로 돌아오기 전에 초등학교에서 약 1km 떨어져 있는 내가 살던 곳으로 갔다. 그곳은 옛날 야학교 (그때 공민학교)가 있고 숲이 있는 곳인데 숲은 그대로 였고 야학교는 현대 역사관으로  변모되어 있었다. 내가 살던 집터에는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 있고, 가을에 밤을 따먹었던 두 구루의 밤나무는 헐신 많이 자라 있었다.

 

이 집터에 서서 잠시 어린 시절의 상념에 잠겨 보왔다. 그 때 나는 아무련 꿈도 없었다. 부산으로 이사와서 온갖 일도하고, 알바를 하여 대학을 졸업했고,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월남전도 참전하였다. 그 뒤 직장 생활을 하면서 모교 대학에서 7년 더 공부를 하였다. 어린시절 젊은 시절 가난하여 사먹을 돈이 없어 금정산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면서 허기채우면서 면학에 몰두 했던 시절을 생각하니 눈물이 한없이 쏟아졌다.

아마도 사진계 후배 모친의 장례식장이 이곳이 아니였다면 어린 시절 내가 살던 이곳을 생전에 다시 찾을 기회가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9년 정도 살았지만, 한이 맺힌 내 어린시절의 고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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